1786년 9월 3일 새벽 세 시. 독일 중부의 온천 도시 카를스바트의 한 여관에서, 한 사내가 가명으로 쓴 가짜 여권을 들고 우편마차에 올랐다. 하인도 비서도 동행하지 않았다. 행선지를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는 짐 속에 한 통의 편지를 넣어두었는데, 며칠 뒤에야 자신의 군주 카를 아우구스트 공작이 받아볼 편지였다. 편지의 요지는 단 한 줄이었다. 저는 잠시 떠나야겠습니다.
이 사내의 이름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당시 서른일곱 살. 바이마르 공국의 추밀고문관이자 광산 책임자였고, 이미 『젊은 베르터의 슬픔』으로 유럽 전역에 이름이 알려진 작가였다. 명예와 지위와 안정. 인생의 저울이 가장 균형 있게 멈춰 있을 시기였다. 바로 그 순간에 그는 도망쳤다.
왜 떠났는가
괴테가 이탈리아로 떠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다. 어떤 학자는 슈타인 부인과의 길어진 관계가 그를 숨막히게 했다고 말한다. 어떤 이는 십 년간 도맡아 온 행정 업무가 그의 시인으로서의 자기를 짓누르고 있었다고 본다. 또 어떤 이는 단순히 마흔을 앞둔 한 남자의 위기, 우리가 지금 흔히 '중년의 위기'라 부르는 그것이 18세기 식으로 발현되었다고 진단한다.
모두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괴테 자신이 훗날 『이탈리아 기행』의 첫 줄에 쓴 문장은 이런 분석들보다 훨씬 더 단순하고, 훨씬 더 절박하다.
"내가 떠난 것은 마침내, 이대로는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 이탈리아 기행, 1786년 9월 3일
이 문장이 무서운 것은,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이 말을 자기 안에서 듣게 된다는 데 있다. 이대로는 더 이상 살 수 없다. 이 진단은 의학적인 것도 사회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정직하게 들여다본 끝에 도달하는 어떤 임계점에 관한 진술이다. 그리고 이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언제나, 떠나는 것이다.
로마에서의 두 번째 탄생
1786년 10월 29일. 알프스를 넘어 베니스, 페라라, 볼로냐, 피렌체를 거쳐 마침내 로마에 도착한 괴테는 그날의 일기에 이렇게 쓴다.
"오늘에서야 비로소 나는 태어났다."
이 한 문장은 이탈리아 기행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자, 동시에 우리가 '이주'라는 행위를 다시 들여다볼 때 결코 지나칠 수 없는 통찰이기도 하다. 로마에서 괴테는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처음으로 자기 자신이 되었다. 바이마르의 추밀고문관이라는 가면을, 베르터의 작가라는 명성을, 슈타인 부인의 연인이라는 자리를 모두 벗고, 그저 한 명의 학생으로 로마의 폐허 속을 걸었다.
그는 매일 아침 콜로세움을 찾았고, 라파엘로의 프레스코 앞에 앉아 몇 시간씩 스케치를 했고, 식물의 잎맥을 들여다보며 모든 식물의 원형이 되는 '원식물(Urpflanze)'을 상상했다. 이 시기의 작업은 후일 그의 자연과학 저술과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파우스트』의 토대가 된다. 그러나 본인은 그것을 의도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보고 있었을 뿐이다.
여행기가 아니라 재탄생의 기록
『이탈리아 기행』이라는 제목 때문에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여행기로 오해한다. 풍경 묘사와 미술 비평과 식물학 노트가 가득한, 18세기식 그랜드투어의 기록.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이 책의 진짜 주제는 단 하나다. 한 인간이 어떻게 자기 자신으로 다시 태어났는가.
괴테는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미학을 배운 것이 아니다. 그는 새로운 자기를 배웠다. 정확히는, 자기 안에 이미 있었으나 바이마르라는 환경에서는 결코 길러질 수 없었던 자기. 환경이 그 사람을 만든다는 명제는 절반의 진실에 지나지 않는다. 더 깊은 진실은 이것이다. 어떤 환경 안에서는 결코 자라날 수 없는 자기가 사람마다 분명히 존재하며, 그 자기를 만나려면 그 사람은 반드시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
이것이 괴테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정직한 메시지다. 떠나라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직시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직시한 끝에 이대로는 살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면, 그때는 떠나는 것이 곧 자신에게 정직해지는 유일한 방법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민이라는 두 번째 탄생
UREKA가 매일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인생의 어느 임계점에 서 있는 분들이다. 직장에서 더는 자신을 알아볼 수 없게 된 마흔의 회사원. 결혼이라는 형식 속에서 자기가 누구였는지 잊어버린 삼십대의 디자이너. 한국 사회의 속도에 더는 발맞출 수 없다고 느끼는 이십대 후반의 연구자. 부모의 기대와 자신의 욕망 사이에서 길을 잃은 의대생.
이들은 모두 다른 이유로 우리를 찾아오지만, 면담의 끝자락에서 거의 같은 문장을 한다. 이대로는 살 수 없을 것 같아서요. 괴테가 1786년 카를스바트의 새벽에 가졌던 그 감각이, 240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의 사람들 안에서 동일하게 작동하고 있다.
물론 이민은 답이 아니다. 적어도 모든 사람에게 답이 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은 한국 안에서 자기 자신을 더 잘 만난다. 어떤 사람은 직장을 옮기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어떤 사람은 단지 한 번의 긴 휴가가 필요할 뿐이다. UREKA가 가장 자주 하는 일은 이주를 권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권하지 않는 것이다. 면담의 60퍼센트는 "지금 가시면 안 됩니다"라는 결론으로 끝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떠나는 것이 자신에게 정직해지는 유일한 길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는 묻는다. 당신이 가려는 곳은 어디인가. 그곳에서 무엇이 되고 싶은가. 어떤 자기를 만나러 가는가. 비자와 거주허가와 세금과 보험. 우리가 다루는 일들은 모두 이 질문들에 부속한 실무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 일은 그 사람이 자기 자신과 정직하게 마주 앉는 데서 시작한다.
되돌아온 괴테
1788년 6월. 약 1년 9개월의 이탈리아 체류를 마치고 괴테는 바이마르로 돌아온다. 그러나 돌아온 사람은 떠났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친구들은 그를 거의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이전의 직책 일부를 내려놓았고, 슈타인 부인과의 관계는 끝을 맺었으며, 곧 평생의 동반자가 될 크리스티아네 불피우스를 만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행정가가 아니라 시인으로서.
이탈리아 기행이 그에게 남긴 진짜 선물은 풍경의 기억도, 새로운 미학적 지식도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 삶을 다시 자기 손으로 잡는 일이 가능하다는, 한 번 그렇게 해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확신이었다.
이민이라는 것도 그런 일이기도 하다. 모두에게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