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치히 중앙역에서 트램 14번을 타고 서쪽으로 12분. 플라크비츠(Plagwitz)역에 내리면 가장 먼저 마주치는 것은 19세기 말 산업혁명기에 지어진 붉은 벽돌 창고들이다. 한때 면직물과 기계 부품을 찍어내던 이 건물들은 지금 갤러리이고, 디자인 스튜디오이고, 사워도우 베이커리이고, 비건 라멘집이다. 베를린의 크로이츠베르크에서 본 것 같은 풍경이다. 다만 임대료는 그 절반도 안 된다.
숫자들
2025년 기준 베를린 평균 월세(2-Zimmer, 60㎡)는 €1,420이다. 2018년 €920에서 7년 만에 54퍼센트가 올랐다. 같은 평형의 라이프치히 평균 월세는 €640. 베를린의 약 45퍼센트, 한국식으로 환산하면 약 92만 원 수준이다. 베를린 사람들이 라이프치히로 이사하는 가장 단순하고 압도적인 이유다.
그러나 임대료만으로 도시의 매력이 설명되지는 않는다. 임대료가 싼 도시는 독일에 많다. 켐니츠도, 할레도, 마그데부르크도 라이프치히와 비슷한 가격대다. 그런데 인구가 늘어나는 도시는 라이프치히뿐이다. 2024년 한 해 인구 증가율 9.4퍼센트. 독일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대도시다.
왜 라이프치히인가
플라크비츠 지구의 카페 '리벨레(Libelle)'에서 만난 이수연 씨(34, 일러스트레이터)는 베를린에서 8년을 살고 작년에 라이프치히로 이주했다. 그는 이유를 두 가지로 정리한다.
"베를린은 작업하기엔 너무 시끄러워졌어요. 노이쾰른에서 작업실 구하려면 €900은 불러요. 여기는 같은 평수가 €350. 두 번째 이유는, 도시 자체의 밀도가 좋아요. 한 동네에 모든 게 다 있어요. 베이커리, 갤러리, 클라이언트 미팅 카페, 사워도우. 베를린은 너무 커져서 한 가지 일 하러 트램 40분 타야 하잖아요." — 이수연, 일러스트레이터
두 번째 이유가 흥미롭다. 도시의 밀도. 라이프치히는 인구 60만 명, 면적은 베를린의 1/3 정도다. 그러나 문화 인프라의 밀도는 결코 작지 않다. 베를린이 80년대에 가졌던 그 '걸어다닐 수 있는 도시'의 감각이 라이프치히에 남아 있다.
역사적으로도 이 도시는 처음 가는 곳이 아니다. 라이프치히는 18세기부터 출판과 인쇄의 도시였고, 바흐가 27년간 일했던 도시이며, 동독 시절에는 라이프치히 도서전(Buchmesse)이 동·서 출판인이 만나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직전, 매주 월요일 밤 니콜라이 교회 앞에 모여 '평화 기도(Friedensgebet)'를 했던 사람들의 도시이기도 하다. 그 자리에서 동독 체제가 처음 흔들렸다.
베를린이 80년대에 가졌던 그 '걸어다닐 수 있는 도시'의 감각이 라이프치히에 남아 있다.
스타트업·창작자·이민자
임대료가 싸다는 사실 하나로는 도시가 살아나지 않는다. 라이프치히가 흥미로운 것은 이주해 온 사람들의 구성이다. 베를린에서 옮겨온 작가·디자이너·일러스트레이터가 한 축. 동독 출신이지만 그동안 라이프치히 외부에서 일하다 돌아온 30대 후반이 또 한 축. 그리고 점점 늘어나는 비EU 국적의 IT·창업자가 세 번째 축이다.
독일 IT 스타트업 인큐베이터인 SpinLab는 라이프치히에 거점을 두고 있고, 이곳을 거쳐간 한국 창업자도 이미 십여 명이 넘는다. 베를린에 비해 영어 사용 비중은 낮지만, 그 단점이 오히려 독일어 학습 동기를 강화한다. 서울에서 독일어 학원 다니는 것보다, 라이프치히 동네 빵집에서 독일어로 호밀빵 사는 게 훨씬 빠르다.
그늘
물론 모든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라이프치히는 여전히 구 동독 지역에 속해 있고, 정치적으로는 극우 정당 AfD의 지지율이 작센 주 평균 28퍼센트로 독일에서 가장 높은 편이다. 라이프치히 시내 자체는 좌파·녹색당 지지가 우세하지만, 외곽으로 한 번만 나가도 분위기가 달라진다. 한국에서 온 이주민이 처음 일주일 정도 적응 기간을 거치며 가장 먼저 체감하는 부분이다.
또 하나는 독일어 의존도다. 베를린에서는 영어만으로도 일상 대부분이 가능했다면, 라이프치히는 그렇지 않다. 동네 카페에서 주문하고, 시청 사무에 가고, 부동산 계약하는 모든 과정에서 최소 B1 수준의 독일어가 필요하다. 베를린에서 라이프치히로 옮긴 이주민들이 가장 먼저 마주치는 현실이다.
UREKA의 시선
UREKA가 라이프치히를 '다음 베를린'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도시는 자기 속도로 자기 시간을 산다. 그러나 한국에서 베를린만을 목적지로 생각하던 분들에게, 동독의 다른 도시를 한 번쯤 진지하게 검토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다. 특히 작업이 핵심인 직군 — 일러스트레이터, 작가, 디자이너, 독립 연구자, 창작자 — 에게는 베를린의 임대료가 작업 가능성 자체를 위협하는 시점이 이미 지났다.
라이프치히 외에 우리가 함께 보는 도시는 드레스덴, 할레, 그리고 약간 다른 결로 슈투트가르트 외곽이다. 각각의 도시는 다른 강점과 다른 그늘이 있다. UREKA는 면담에서 단지 '독일'이 아니라 '독일의 어느 도시'를 함께 정한다. 그것이 이주의 첫 번째 결정이고, 가장 자주 잘못 내려지는 결정이기도 하다.
다음 호 DACH DISCOVER에서는 빈(Wien)을 다룬다. 가장 우아하지만, 가장 까다로운 도시.